내가 M.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때는 친구의 소개로 소개팅을 한 자리에서였다. 오랜만에 하는 소개팅이라서 기대와 함께 부담감도 컸다. 우선 커피숍에서 주선와 함께 차를 마시고, 저녁을 먹고, 마지막으로 영화를 함께 보게 되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여자에게 최대한 멋있게 보이려고 노력했던 내가 선택한 영화는 하필이면 M. 나이트 샤말란의 <식스센스>였다.
나는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방심한 채 스크린과 마주하게 되었다. 영화의 시작은 잔잔하게 진행되었다. 한 아동심리학자의 성공과 행복, 어느날 불쑥 찾아온 불청객, 마음의 상처를 갖게 된 심리학자의 고뇌어린 삶. 영화는 잔잔한 멜로영화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화는 조금씩 으시시한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방심했던 나는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마치 추운 겨울 바람이 천천히 옷깃을 파고들더니 어느 순간 등꼴을 오싹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이없게 유령의 모습이 나오는 몇몇 장면에서 소그라치게 놀라면서 경기를 일으켰다. 옆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영화에 완전히 몰입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에 나는 얼을 빼았겼다. 요즈음은 하도 반전을 기본 플롯으로 삼는 영화들이 많지만. 그 때 당시만 해도 <식스센스>의 반전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하도 방심한 채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반전에 대해서도 전혀 예측 못했던 나는 이번에도 쎄게 뒤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영화가 모두 끝나자 나는 녹초가 되어있었다. 영화에게 이렇게 많이 얻어 맞아 본지 참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단 2시간의 시간이었지만 나의 심경에 변화가 있었다. 안절부절했던 내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고, 문득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다. 너 지금 이 아가씨가 마음에 드니? 마음에 들지도 않으면서 왜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냐?
나는 담담히 여자를 떠나보내고 곰곰히 영화에 대해서 생각하며 밤거리를 걸었다.
<식스센스>가 개봉되었을 당시. 이 영화의 충격적인 반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 후 샤말란 감독의 <언브레이커블>이 개봉 되었을 때 사람들은 또다시 샤말란에게서 알싸한 반전의 묘미를 기대했다. 하지만 <언브레이커블>의 반전은 시시하였고, 그 당시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 후 M. 나이트 샤말란은 자신의 독특한 세계관을 표현하는 여러 작품을 내 놓았지만 <식스센스의 그림자가 그의 앞 길에 드리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반전을 이야기 하는 감독으로만 기억하고 새 작품의 반전에 실망한다. 하지만 돌이켜 보건데 그는 결코 반전만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아니다. 반전 보다 더 깊은 의미를 그의 영화는 이야기한다. 특히, 초기 세 편의 작품은 하나의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든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샤말란의 재발견을 위해서 <식스센스>, <언브레이커블>, <싸인>이 담고 철학과 세계관을 분석해 보기로 하겠다.
첫번째, 세 영화의 공통점들
1) 주인공은 우울함에 빠져 있는 중년의 남자이다.
<식스센스>의 말콤, <언브레이커블>의 데이빗, <싸인>의 그래함. 모두 초반부터 우울한 표정으로 등장한다. 모두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중년이다. 영화내내 웃는 표정이 거의 없고, 하루 하루를 힘겹게 지낸다. 복잡한 세상사에 함몰되어서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2) 주인공은 부인과 관계가 좋지 않다.
말콤은 사건이 있은 후 부인과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고, 무시당하며 지내고 있다. 데이빗은 부인을 사랑하지만 한 편으로 멀리하려고 하고, 두 사람은 별거를 앞두고 있다. 싸인은 아예 부인이 죽어버린 상태이다.
3) 주인공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있다.
말콤은 자신에게 상담받은 아이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자신을 살해하러 온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이 심리학자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불안해 한다. 데이빗은 미식축구 선수를 포기한 일에 미련을 가지고, 직장을 뉴욕으로 옮기려고 알아보고 있다. 그래함은 부인이 죽고나서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농부가 되었다.
4) 주인공의 아들(또는 유사 아들)은 그를 의지한다.
<식스센스>에서 유령을 보는 아이 콜 시어는 아버지가 없는 편모가정에서 살고 있다. 콜은 말콤을 아버지 처럼 의지하면서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언브레이커블>에서는 데이빗의 아들은 아버지가 초인이라고 믿고 그가 영웅적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싸인>에서는 그래함의 남동생과 아들이 그래함에게 의지한다. 그들은 그래함이 다시 믿음을 찾고 자신들을 지지해 주기를 바란다.
5) 세 영화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상 속에 녹아들어 있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
샤말란의 장점은 평범한 현실 속에 불쑥 초자연적인 현상이 벌어질 때 일상인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각각 유령, 슈퍼히어로, 외계인 이라는 공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등장인물 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특히 <싸인>을 보면서 갑작스런 외계인의 출현에 사람들이 공포에 떠는 반응은 정말 현실감이 있었다.
두번째, 운명 또는 대타자의 시선으로 바라 본 나의 삶
이 세 편의 영화가 우리에게 먹먹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주관에 매몰되어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별안간 객관의 시점으로 이야기 전환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나름대로 현실에 충실 한 채 살고 있다. 현실 속에서 많은 갈등을 느끼고, 괴로워 하고, 자신의 한계에 절망한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갈등은 덧없이 해소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성격과 정체성을 가지고 일상을 살아간다. 자신의 좁은 시각에 답답해 할 때도 있지만, 가장 편하고 안전한 방법이기 때문에 편견조차도 꼭 붙들고 있으려 한다. 하지만 이 주관적인 삶 속에서 가끔씩 어떤 깨달음에 다가온다. 주관이 깨지면서 객관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볼 때, 자신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자신도 이야기 속에 속해 있는 인물이며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움직여 왔다는 깨달음.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운명이라고 부른다.
또한 심리학적으로 설명한다면,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대타자인 초자아의 발현일 것이다. 현실원칙에 사로잡혀 있는 자아를 뚫고 무의식적은 초자아는 이야기한다. 너는 어떤 운명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라고.
그렇다면 우리의 운명은 모두 결정되어 있는 것 일까?
세번째, 필연성과 우발성에 대한 사유
1) 라이프니츠의 충족이유율과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
서구에서의 필연성에 대한 사유는 헬레이즘과 헤브라이즘의 합작으로 완성되었다. 그리스 철학에서 필연성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근거로 한다. 플라톤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이 세계는 본질적인 이데아의 세계의 그림자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세계는 불완전하고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사실 세상이 움직이는 이유는 본질적인 이데아의 원리에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현상은 그 본질인 이데아의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제1원인으로 존재하고, 모든 일은 신이 예정대로 진행되는 필연이라고 말한다. 특히 칼뱅의 예정론은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므로, 인간의 선행이나 어떤 노력도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완고한 필연론이다.
이런 두 문명의 필연론은 근대사상을 통해서 정점에 이른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모든 현상을 필연성으로 설명하면서 충족이유율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우리가 느끼는 현상은 필연과 우연으로 나뉜다. 우선 필연은 모순율에 따라서 움직이는데, 예컨데 1+1 = 2 라는 수학적인 진리는 논리를 따라서 생각하면 똑같은 결과에 이른다.
그리고 우연으로 보이는 현상은 사실 아주 복잡한 원인들의 종합적인 결과이다. 북경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멕시코에서 태풍이 발생한다는 카오스 이론의 예시처럼 우연으로 보이는 결과에는 수많은 작은 원인들이 있다. 이런 논리를 라이프니츠는 충족이유율이라고 명명하였다. 즉, 인간의 유한한 능력으로는 우연으로 보일지라도 신의 무한한 능력으로 모든 원인과 결과를 세세히 따져 본다면 우연은 없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논리는 근대문명의 초석을 이루었다. 어떤 현상을 무한을 통해서 분석한다는 개념은 미적분의 기초이고, 이 미적분은 물리학의 발전에 발판이 되었다.
서구의 역사에서 필연론은 주류를 차지해 왔다. 하지만 아주 일부의 사상가들은 우연을 기초로 한 세계관을 가정하였는데,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르는 우연에 입각한 철학을 정리해서 "우발성의 유물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발성의 유물론은 기존의 필연의 유물론과 반대되는 사고하기 조차 어려운 유물론이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로 부터 현대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비밀스럽게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는 마르크스주의 마저도 필연의 유물론이 아니며 마주침의 유물론이 진정한 유물론이고, 세상을 반영하는 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에피쿠로스의 저작에서 클리라멘이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클리라멘이란, 직선으로 떨어지는 원자 속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편의를 이야기 한다. 에피쿠로스는 무한한 우주에 수없이 많은 원자들이 똑같은 법칙으로 움직인다면 어떤 사건이 발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클리라멘이라는 자유원자, 우발적으로 궤도를 이탈한 원자를 상정했고 이 클리라멘에 의해 원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원자가 결합되고 물질이 생성된다고 주장했다.
알튀세르는 이 에피쿠로스의 주장을 가져와서 기존 철학의 모든 가치를 전복하였다.
세상은 정해진 법칙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사건이 먼저 발생하고 그 우발적인 움직임이 응고되어 법칙이 된다, 라고 하였다.
2)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
철학뿐만 아니라 물리학에서도 필연론과 우연론의 대결은 팽팽하다.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적분을 창안한 뉴튼은 (그렇기에 비슷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필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태엽 시계같은 우주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의 이론은 19세기 까지의 근대과학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뉴튼의 우주관에 어긋나는 두가지 이론이 그의 세계관을 흔들어 놓는다. 하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고, 또 하나는 양자론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절대적인 시공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깨버렸다. 그러나 사실 아인슈타인은 결정론자였다. 그는 뉴튼의 물리법칙을 수정해서 보다 더 정확한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새로운 물리이론인 양자론은 양자의 움직임은 확률로 존재한다는 우리의 직관과는 정반대인 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인은 양자론의 주창자 보어와 격렬한 토론을 벌이는데,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그러자 보어가 대답했다.
"신이 하는 일에 이러쿵 저러쿵 참견하지 말아라."
M. 나이트 샤말란의 3부작 영화의 핵심은 바로 이 우연과 필연에 대한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다. 특히 그 정점은 <싸인>에서 볼 수 있다. 영화의 흐름대로 따라간다면, 편안한 결론에 다달을 수 있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다, 라고.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하고, 심란해 진다. 그렇다면 신은 외계인에게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들의 어머니를 희생한 것일까? 단 한마디를 전달해 주기 위해서 그녀를 죽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너무나 어이없지 않는가.
영화를 보고 나서 내 머리 속에는 우파니샤드의 구절이 떠올랐다.
필연 위에 우연이 있고, 그 우연 위에 절대자가 있다.
필연도 우연도 절대자인 하나님 아래서는 동일한 것이다. 단어를 조합하여 문장을 만들었지만, 정말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이 되어 버렸다. 우연과 필연의 결합. 아마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수수께끼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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